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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스승의 전수를 통해 참된 명상을 발견하라,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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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와 지구에서 움직임과 바다가‍ 결합하여 즉 대기와‍ 온도, 움직임이‍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신의 행복한‍ 자비와 사랑의 바다에서 진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만물이 자연의 힘과 결합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 힘이 발생합니다. 모든 움직임은 일종의 힘 즉 두 개의 힘을 생성하죠. 찬성과 반대의 힘이죠.[…] 그래서 이 부정과 긍정이 서로 혼합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서로 통합되면, 제3의 것을 만들고, 그렇게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성경과 불경이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남은 하나의 문제는‍ 자성 혹은 이 말씀, 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죠? 그러니 신을 아는 것이 이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돌아오면, 말씀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말씀이 만물을 만들었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말씀, 이 하나님에서 나왔습니다. 사실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면…‍

이제 재미삼아‍ 지적인 논쟁을 한번 해봅시다. 성경에 말씀이 하나님이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면, 말씀이 하나님이라면, 왜 신은 그냥 단순히‍ 이리 말하지 않았을까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하나님이었다』 『태초에 신이 계셨다』 이게 더 간단하지 않나요? 왜 이렇게 말해야 하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이 하나님이었다』 그냥 말하면 되죠. 『말씀이 하나님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은 잊으면 되는데요, 혹은 하나님이 있다면 말씀을 잊으면 되죠. 왜 복잡하게 했을까요? 누가 아나요? 손 좀 들어보세요. 당신이 아는가요?

(진동이 있기 전에 신은‍ 허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좋아요. 당신은 깨달았네요. 당신에게 1점 주겠어요. A학점요. 미국에서‍ A학점이 좋은 건가요? 그래요, 다행이군요. 아니면 문제가 생기겠죠. 따라서 우리는‍ 불경에서도 배워요. 불경 역시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라고 하죠. 우리는 또한 『도덕경』에서 배웠어요. 도교에서도‍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도만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름이 생겼죠, 이름이 왔어요. 이름, 그것은 진동 즉 말씀이죠. 서양에서는 말씀이라 하고‍ 중국어로는 당시에‍ 이름이라고 했나 봐요. 언어 간의 차이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여러 종교를 분리하며‍ 서로 싸우게 만들어요. 그것이 안타까워요. 그러면 안 되죠.

또 태초에는 오직‍ 하나님이나 사랑의 바다라고 부르는 것만 있었고, 다른 것은 없었어요, 진동도 빛도, 어둠도‍ 생각도, 움직임도‍ 전혀 없었어요. 그러다가 움직임이 생겼고, 그것이 말씀이고 진동이죠. 그 후에 만물이 창조되었어요. 그러니‍ 사실 말씀은 신이 아니지만, 말씀이 신입니다. 신이 없으면 말씀이 없고,‍ (내적 천국의) 음류도 없고‍ (내적 천국의) 음류가‍ 없다면, 우리는 신을 모르죠. 그렇게 됩니다; 아마 그런 뜻이겠죠.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없다면, 그것은‍ 바다가 아닌 것 같고‍ 큰 연못이나 고요한 호수 같죠, 호수는 고요하고‍ 파도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바다엔 파도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걸 알아요. 그리고 바다에서 파도가 생기지만, 사실 바다엔 파도가 없어요. 알겠나요? 또한 그렇게 바다에 있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죠:‍ 물고기 주민도 오징어 주민도 또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역시 바다에서 생깁니다. 그렇지 않나요?

온도와 지구에서 움직임과 바다가‍ 결합하여 즉 대기와‍ 온도, 움직임이‍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생겼어요. 마찬가지로, 신의 행복한‍ 자비와 사랑의 바다에서 진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만물이 자연의 힘과 결합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 힘이 발생합니다. 모든 움직임은 일종의 힘 즉 두 개의 힘을 생성하죠. 찬성과 반대의 힘이죠. 그걸 중국에서는 음양이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긍정과 부정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이 부정과 긍정이 서로 혼합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서로 통합되면, 제3의 것을 만들고, 그렇게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무 멀리 가는지도 모르겠네요. 마치 전기와 같아요. 양극이 있지요. 하나는 음극이고‍ 하나는 양극이며‍ 이 양극과 음극이‍ 함께 합쳐지면‍ 그때 힘이 생겨요. 그것을 전력이라고 하죠. 그때 모든 움직임과 모든 빛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생깁니다. 사실 전기는 양극이나‍ 음극이 아니지만,‍ 양극이나 음극이 없으면‍ 전기가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게 생깁니다.

신은 선도 악도 아니죠. 신은 단지 무심함과‍ 사랑의 바다입니다. 신에겐 증오가 없어요. 신에겐 더러움과 악과 죄가 없어요. 그러므로 신을 사랑과‍ 자비의 바다라고 불러요. 신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지 않아요. 그래서 신을 사랑의‍ 바다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사랑의 바다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진동이 생기고‍, 그 후 부정과 긍정이‍ 생겨나 우리에게‍ 비교할 시간을 줍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지혜이고 무지인지 알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재미있죠, 그렇죠? 정반대의 힘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무지 속에 있을 겁니다. 우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죠.

또 다른 이론이 있어요. 사람들은 불교에 신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불교도를 무신론자라 해요. 이게 맞는 용어인가요? 믿지 않는 이교도라는 거죠. 그런데 불교도는 자신이‍ 무신론자가 아니라 하죠. 그들은 물론 신을 믿지는 않지만‍ 부처님을 믿는다고 해요. 그래서 양측은 결사적으로‍ 지적으로 싸웁니다. 부처님이 신은 없다고‍ 했을 때, 그 뜻은 신이‍ 없음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거기 앉아서 『너는 나쁘고 너는 착하다』고 하며 이 사람은 벌주고 저 사람은 상을 주는 인격신이 없다는 뜻이죠. 부처님이 뜻한 것은‍ 이름이 없는 존재, 즉‍ 여러분이 명명할 수 없는 이름, 사랑과 자비의 바다이며 이것이 진정한 이름입니다. 그러니 사실 모든 나라와 여러 나라 국민과 깨달은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말하니‍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기 쉽지요. 게다가 성직 기술자의 거대한 기구가 있어- 깨닫지 못한 사제와 승단, 성직 기술자들이 모든 면에서 겁주고‍ 자신들의 욕망과‍ 명예나 권력을 위한‍ 이기적 동기로‍ 헌신자를 모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유일한 이유죠.

그들 모두가 깨달았다면, 모든 종류의 종교 경전을‍ 존중했을 것이고‍ 내면에 들어가는 방법을 이해하고 직접 신과 연결하여 언어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것이 바로 노자가 말한‍ 『앎이 없이 아는 것』이며,‍ 노자는 또 말했어요,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누가 이 뜻을 아나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지혜롭지만,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일까요? 누가 알아요? 5달러, 10달러 줄게요, 몰라요? 아주 비싼 답이죠. 아무도 모르나요? 그래요, 뒤에 있는 사람이‍ 먼저죠, 아마도…‍ 그래요, 네 당신이요. 당신이군요 미안해요. 그가 먼저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로운 이는 말하지 말라는 충고가 필요 없고‍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지혜를 보여주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과시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요, 알겠어요. 당신 뜻을 알겠어요. 그의 뜻은 지혜로운 이는 어쨌든 어리석은 자가 자신과 동의하지 않을 걸 안다는 거죠, 안 그래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는 것과‍ 보는 것이 정말 다르니까요.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자신을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아요.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어떤 말을 하든 지혜로운 자는 『그래, 그렇겠지. 좋아, 잘해봐』라는 식으로 말하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요, 이것과 비슷해요, 여러분에게 다른 의견이 있나요?

(제 생각에는 어쩌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공부할수록 자신이 안다는 것을 더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잘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텐데‍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요, 그것도 사실이죠. 그의 말은 더 배울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알게 된다는 거죠. 그러면 말을 안 하게 되고‍ 평가도 안 하게 되고‍ 토론도 안 하게 됩니다. 더 겸손하게 돼요. 그것이 맞아요. 그러니 더 배울수록‍ 더 어리석어 보이고 더 무지해지며 겸손해져요. 하지만 사실 그의 말은‍ 더 겸손해진다는 겁니다. 그게 더 정확한 말이죠.

사실 더 배울수록‍ 더 겸손해집니다, 모두에게 신의 본성이‍ 있고 부처님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니까요. 또한 우리는 모든 이에게 또 모든 이웃에게 배우며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을 하나하나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죠. 그러니 사실은 더 겸손하게 됩니다. 아마 노자는 더 겸손해진다는 의미로 말했을 겁니다. 나도 두 사람과 동의해요. 나중에 내게 10달러를‍ 받을 것 같네요. 이런 건 무료로 해야 하죠. 언제나 상을 기다릴 수는 없어요. 하나 어쨌든 내가 말했으니 그걸 받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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