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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위대한 근원과 다시 하나 되기 위해 살아있는 스승을 찾으라』,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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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부처님은 감히 물질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 카르마의 법칙, 인과의 법칙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비구들이여, 중생의‍ 고기를 먹지 말라』‍ [...] 그러나 천상의 눈이 열리면 ‍-소위 깨달았다면서‍ 고기를 먹는 자들을 보면-‍ 그들의 자장이나 오라가 검은색, 갈색, 커피색‍ 반점으로 혼합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깨끗하거나 아름답지 않죠. 밝지 않고 어두워요. 그러면 알게 됩니다.

(왜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까? 다른 활동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까?)‍ 명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은 깨달음을 위한‍ 일의 한 부분일 뿐이에요. 그러나 명상 없이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명상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어요.

입문해야 합니다;‍ 당신이 열려야 해요. 내면의 지혜가 열리면‍ 깨달음을 얻어요 -‍ 명상에 의한 게 아니고요. 그러나 지혜가 열린 후에는‍ 고요함의 과정을 통해‍ 매일 지혜와 깨달음을‍ 키워야 합니다. 지혜와 본성을 인식하기‍ 위해 고요해지는 거죠. 신의 메시지를‍ 인식하기 위해서요. 그것을 명상이라고 합니다. 서서 하든 앉아서 하든‍ 누워서 하든지요. 그러니 이렇게 가부좌를‍ 하면 깨달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니, 아니죠. 고요한 상태에서 내면으로 들어가 자기 지혜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내재한 지혜가 없다면 얼마나 오래 명상하든 상관없어요, 별 차이가 없어요. 소용없지요.

(자신의 말과 생각, 행동 또는 경험이 참으로‍ 부처와 보살의 그것들과 일치하고 자기 환상과‍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건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올바른 영적 법문으로 수행한다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어요. 입문할 때 진짜 부처와 가짜 부처를 구별하고‍ 진짜 체험과 환상을 구별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알 방법이 없어요.

여러분도 듣고 싶나요? (예)‍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어요, 『참 부처, 그리고‍ 진짜 내면세계와 환상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명상하면서 내면세계를 체험할 때 그것이 진짜인지 환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나는 입문할 때 구별하는 법을 알려준다고 했어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리고 스승의 가호도 있습니다. 그러니 알게 되죠;‍ 깨달은 후에는 압니다. 입문 후에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아요. 내가 모두 말해 줍니다. 참 스승은 여러분에게 모든 걸 말해야 합니다. 모든 방해, 길 위의 모든 구멍, 모든 환상, 악마의 모든 속임수 등요.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모르니 참 스승이 아닙니다.

(만약 『성불』이‍ 부처님의 체험과 일치하는 많은 불교 스님의 공통된 체험이라면, 불교에 왜 그렇게 많은‍ 다른 법문이 있고 그것 중 많은 것이 서로 모순됩니까? 예를 들어 대중 종파는‍ 채식하고 밀교 종파는 육식하는 것처럼요)‍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세상 사람은 마음대로 추측하고 수행을 시작했죠. 그들은 마구잡이로 많은 법문을 고안했어요. 가령 원래는 대중 종파나 밀교 종파가 없었습니다. 『대중적』이 뭐죠? 『공개적』이란 뜻이에요. 『밀교』는‍ 드러내지 않는다는 거고요. 불교에는 공개적인 면과‍ 비전의 측면이 있습니다. 내 방법에도 대중적인 면과 비밀스러운 면이 있어요. 『대중적』이 무엇이죠?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대중적』인 거죠. 『비전』 부분은‍ 내가 말을 멈추고 비밀리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비전』 부분이에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그들에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해되나요? 설령 그들이 당신 옆에 앉아 있어도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전하는지‍ 당신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는지, 당신의 영적 상태를 모릅니다, 그것이 『비전』 부분이죠. 『밀교 종파』가‍ 『비밀』이라는 건 아니죠. 밀교 종파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해했기에 오늘날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집에 가서 능엄경이나 열반경을 읽어 보세요.

모든 불경에서 불교도는‍ 채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육식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마야의 길을 가르치는 거죠. 능엄경을‍ 읽지 않았나요? 읽지 않았다면 집에 가서 읽어 보세요. 지장보살본원경이나‍ 범망경을 읽으세요.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모른다면 우리가 왜 비건이 돼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소책자를 읽으세요. 소책자는 모든 불경이 채식을 강조한다고 언급합니다. 부처님이 가신 후 사람들은 엉망진창이 되었어요. 그걸 피할 수 없어요. 모든 종교가 그래요. 깨달은 스승이 떠난 후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죠.

여러분도 대화 내용을 알고 싶은가요? (예)‍ 그것은 이래요, 한 사람이 질문했어요... 중국어로요. 미안하게도 중국어였어요. 그 사람은 내게, 『깨달음이 모두 같다면‍ 왜 불교에는 많은 종파가‍ 있으며, 왜 다른 수행법이 그리 많은지 물었어요?』 아, 미안해요. 법문이 많다는 것도‍ 옳은 표현은 아니네요. 후세 사람들이 제멋대로‍ 추측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밀교는 과자나‍ 유사한 것을 쓰는데 인도 불교에서는‍ 그런 건 사용하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깨달음을 얻고 사람들에게 과자를 주지도 않았고‍ 부처에게 절하지도 않았죠. 그렇지 않나요? 그 후 다른 곳에서는 그 지역의 풍습과 관습과 믿음에 물들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경전을 외우거나 부처에게 절하지 않았죠. 그는 밀교 종파가 하듯이 크림이 든 과자를‍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어요. 절대로요! 그는 그저 앉아서 명상하여 성불하였고 내면의 별을 보고는 부처가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날 실제로 불교가 아닌 소위 영적 수행법이라는‍ 많은 종파가 있게 된 겁니다! 그것은 단지 후세 사람의‍ 발명품일 뿐이죠. 알겠죠? (알겠습니다)‍

이런 대화였지요. 그가 내게, 『깨달음이 같다면 불교는 왜 그렇게 많은 종파로 나뉘어졌냐? 고 물었어요. 또 어떤 종파는 채식을 권장하고 어떤 종파는 밀교의 라마승들처럼 고기를 먹는다고요. 또 수행법도 다양하게 많이 있다고요』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깨달음과 수행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스승의 죽음 이후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변해갔어요. 예를 들어,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명상하면서 내면의 별들을 보고‍ 내면의 (내적 천국의) 빛을 보았을 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어떤 형상에 절하지 않았고, 북을 두드리지도‍ 않았으며, 촛불을 켜지도‍ 않았고, 밀교인 라마 종파처럼 버터 과자를 공양하지도 않았어요.

이 모든 의식과 다른 수행법은 부처님의‍ 열반 후에 나왔어요. 사람들이 깨달음의 법맥을 잃어버린 후에 무언가를 만들어 냈어요. 불교가 티베트에‍ 들어온 후 물론 버터 과자와‍ 모든 형상, 다양한 종류의 형상, 다양한 색깔의 깃발 등등으로‍ 국교의 색깔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티베트의 종교인 본교입니다. 그 후 이것이 불교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이 혼합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중국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로‍ 많은 도교 의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주문을 외우고‍ 북을 치고 촛불을 켜고 그런 모든 것을 했는데 이것들은‍ 순수한 불교가 아닙니다. 순수한 불교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 너무 시끄럽죠!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양초도, 케이크도, 꽃도, 과일도, 외적인‍ 의식도 필요하지 않았죠.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순수한 채식이‍ 불교도의 식사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전에 부처님은 부처가 되려면 채식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어도‍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마귀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에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많은 경전에서 말씀하셨죠. 그러니 그 후에 고기를 먹으면서 불교도라 하면‍ 나는 그것에 대해‍ 어쩔 수 없어요.

예. (저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일부 티베트 불교도가 지은 사원을 알고 있어요) 예 (그곳은 아주 유명하고 매우 거룩한 곳이에요) 예 (그들은 사원을 짓는 동안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육식으로 전환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들이 고기를 안 먹는다고 했나요? (그들은 고기를 먹어요) 오, 예‍ (그들은 사원을 짓는 동안‍ 고기를 먹었어요)‍ 더 많은 힘을 얻으려고? (예 5년 동안요. 제가 아는 한 그들은 여전히 깨달음의 길 위에 있습니다) 오! (그리고 여기 캘리포니아는‍ 아니지만 또 다른 깨달은 스님에게 들었는데 고기를 먹으면 많은 악령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는 힘을 얻는다고 해요)‍ 그렇다면 능엄경이‍ 거짓말을 하네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죠. 능엄경은 불경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이자 수행 경전입니다. 그것을 읽으면 고기를 먹는 사람은 누구나 마왕이 되거나 마왕의 부하가 되지 절대 성불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명시합니다. 집에 가서 읽어보고‍ 내게 질문하지 마세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어요.

(부처님이 악업을‍ 바꿀 수 없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죠,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부처님은 감히 물질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공산 국가에 가면 내가 자유 국가의 국민일지라도‍ 좋든 싫든‍ 그 공산국가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마 불국토에는 법도 없고‍ 나쁜 거나 악도 없겠죠. 그러나 여기는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카르마의 법칙, 인과의 법칙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비구들이여, 중생의‍ 고기를 먹지 말라』‍

오정육에 대해서도‍ 후에 부처님이‍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오늘부터 어떤 고기도 먹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경전들은 티베트어로,‍ 어울락어(베트남어)로,‍ 중국어로, 일본어로, 모든 종류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온갖 언어로 된 것을 읽었는데 전부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은 그들이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자신이‍ 깨달았다 믿을 수 있지만, 당신이 능엄경의‍ 내용을 읽으면‍ 그들이 성취한 경지를 알게 될 겁니다. 그들은 깨달았지만‍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물 주민의‍ 어떤 가운은‍ 우리보다 무겁고 업장이 더 무겁기 때문에... 동물 주민으로 태어났음을‍ 당신도 알고 있으니까요. 이제 이런 종류의 자장을 우리 자장에 가져오면‍ 우리는 동물 주민의 자장과 더 많이 섞이며 당연히 우리는 더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논리적이죠? 미안해요, 당신이 더 깨달은 후에 누가 깨달은 사람인지 알 겁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눈이 열리면‍ 소위 깨달았다면서‍ 고기를 먹는 자들을 보면,‍ 그들의 자장이나 오라가 검은색, 갈색, 커피색‍ 반점으로 혼합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깨끗하거나 아름답지 않죠. 밝지 않고 어두워요. 그러면 알게 됩니다. 미안해요, 그런 겁니다.

(깨달음의 반대되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최종 결과에서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깨달음의 반대되는 힘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둠의 힘이고‍ 장애의 힘입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를 방해하고 무지하게 만들죠. 그것은 우리가 지고의 땅인 정토를 방문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최종 결과의 목적은‍ 바로 해탈이죠! 더는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주의 모든 것을 압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결과입니다. 중생을 구할 수도 있죠.

(제 말은 모든 것의 최종 결과에서‍ 반대되는 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부정적인 힘의 목적이‍ 무엇인가 묻는가요? (예)‍ 그리고 둘 사이에서 싸움의 최종결과도요. 맞나요? (예, 부정적인 힘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우리를 강하게 만들죠. 물이 없으면 수영을‍ 배울 수 없는 것과 같아요. (익사할 수도 있지만요?)‍ 그래요. 복잡한 도로 운전 규칙 없이는 사회 질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운전을 잘하는 법을 배울 수 없죠. 그래서 이 모든 부정적인‍ 힘의 유혹은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서‍ 점점 더 강해지고 의지가 강해지고 힘도 더 강해져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게 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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