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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생활: 무소부재한 본질 - 스리 오로빈도(채식인), 2부 중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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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지구에 지혜와 진리를 가져와 삶에서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도록 고무하고 인간을 신성한 경지로 올려주는 많은 위대한 영적 스승의 고향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존재 중 한 분이 영적 스승, 요기, 철학자, 시인, 정치가인 스리 오로빈도이며 1877년~1950년 우리 행성을 축복했지요.

스리 오로빈도는 정치가로 활동하며 인도 독립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스리 오로빈도는 내적 관조 후에 조국의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대신에 전 인류의 해방으로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스리 오로빈도는 인도 남동부 연안의 퐁디셰리로 가서 묵언 요가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이 영적 수행 중에 자신에게 계시된 내면의 체험을 통해 지혜로 충만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신적 생활 1권~무소부재한 본질 스리 오로빈도(채식인)』 1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스리 오로빈도가 1914~1919년 집필한 『신적 생활』은 원래 지고의 진리를 진실하게 찾는 한, 사람이 겪는 영적 여정을 묘사합니다. 그러한 여정은 영혼의 각성과 직접 신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제4장: 무소부재한 본질

『만일 사람이 브라만을 비존재로 안다면 그는 한낱 비존재가 될 뿐이다. 만일 그가 브라만이 존재함을 안다면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것이다』~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

그때부터 우리는 순수한 영이 우리 안에 절대적 자유를 구현했으며, 우리 존재의 틀과 상태가 보편적 물질이라는 주장을 인정하고, 반대자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들 삶에 적절한 몫과 그들 생각에 마땅한 구실을 주고 그들의 어떤 권리도 비난하지 않으며, 그 오류가 진리를 지배하는 것과 그 과정의 배타성이 끊임없이 커지는 것도 거부하지 않을 수 있지요.

인간의 마음에 그렇게 강력하게 호소하는 극단적인 발언이 있다면, 그것을 단순한 오류와 미신이나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며, 만일 거부하거나 배제하면 복수할 어떤 가면을 쓴 주권적 사실 앞에 서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과 물질 사이의 단순한 타협을 추구하는 목적성의 부족을 만족시킬 해결책과 근거를 찾기는 힘들 것입니다. 타협은 흥정이며, 대립하는 두 개의 힘에 이익을 거래하는 것으로 진정한 화합이 아닙니다. 진정한 화합은 항상 일종의 친밀한 일체감으로 이어지는 상호 이해에 의해 진행됩니다.

따라서 영과 물질을 가능하면 최대한 통합해야 화합의 진리에 제대로 이를 것이며, 개인의 내적 삶과 외적인 존재의 화합을 실천하는 가장 강력한 바탕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주 의식에서 물질이 정신에 실현되고 정신이 물질에 실현되는 합류점을 찾았습니다.

우주 의식에서 정신과 생명은 중재자이며, 일반적인 이기적 사고방식에서 보듯이 더는 분리의 매개체가 아니고, 동일한 미지의 본질에서 긍정과 부정의 원칙 사이에 인위적인 다툼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우주 의식의 정신이 단일성의 진리와 다중성의 진리를 일단 인식하면, 그들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포착하고 그 불협화음을 찾아서 바로 그것을 신성한 조화로 설명하며 화합하는 지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은 신과 우리가 지향하는 삶 사이에서 궁극적인 연합의 중재자가 되는 것에 동의하며 만족합니다. 깨달은 생각과 정제된 감각에서 물질은 영의 형상과 몸으로 구체화하며, 영은 자기 스스로 확장하게 됩니다. 영이 영혼과 진리를 중재자로 인정하며 자신을 물질의 정수로 드러냅니다.

둘은 서로가 신성하고 진실하며 본질임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정신과 생명은 그런 깨달음 속에서 즉시 지고한 의식적 존재의 형상과 도구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물질적 형상 안에 자신을 확장하고 거하며, 그 의식의 다양한 중심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정신은 우주의 상징 속에 표현된 존재의 진리에 대한 순수한 거울이 될 때 완성됩니다. 생명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와 우주적 존재의 활동 안에서 신적 형상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에너지를 보냅니다. 이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이 세상 사람에게 신적 생활의 가능성을 알 수 있으며, 우주와 지상 진화에 대한 살아있는 감각과 지적인 목표를 밝힘으로 즉시 과학이 정당화되며, 인간의 영혼이 모든 고등 종교의 위대한 이상적인 꿈인 신으로 변모함으로써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침묵하는 진아, 활동하지 않고 순수하며, 스스로 존재하고 즐기며, 자신을 고행자의 영원한 목표로 보여준 진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조화와 양립할 수 없는 대립 또한 명료한 진리입니다. 침묵과 활동하는 브라만은 다르거나 대립하거나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우주적 환상에서 하나는 긍정이고 다른 것은 부정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브라만의 두 가지 측면인 긍정과 부정으로, 각각 서로가 필요합니다. 영원히 진행하는 세상을 창조한 말씀은 이 침묵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이 침묵 속에 숨겨진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무수한 우주 체계에서 영원한 신적 활동의 완전한 자유와 전능함을 가능하게 만드는 영원한 수동성입니다. 그 활동성이 되기 위해 불변의 존재의 공정한 지지로부터 자신의 에너지와 변화와 조화의 무한한 힘을 끌어내고, 자기 역동성의 이 무한한 다산 능력에 대한 동의를 끌어냅니다. 사람도 자기 내면에서 브라만의 완전한 고요함과 수동성을 찾고, 그로 인해 똑같은 신의 관용과 신의 지복이 자유롭고 무진장한 활동을 지원할 때만 완전해집니다.

내면이 고요한 사람은 그 침묵이 언제나 우주에 작용하는 에너지를 영원히 공급하고 솟아나게 하는 걸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침묵이 본질적으로 우주 작용을 거부한다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 두 상태가 분명히 양립하지 못하는 것은 긍정과 부정의 날카로운 반대에 익숙하며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데 익숙한 제한된 정신의 오류이며, 양쪽을 동시에 포용할 만큼 방대하고 강한 의식을 갖출 수 없을 뿐입니다.

침묵은 세상을 거부하지 않고 지탱해줍니다. 아니 침묵은 오히려 활동과 활동에서 물러남을 공평하게 지지하고, 영혼이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동안에도 영혼을 자유롭고 고요하게 하는 화합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절대적인 물러남이 있고 비존재가 있습니다. 고대 경전은 비존재로부터 존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후 존재는 반드시 다시 비존재로 가라앉습니다.

만일 무한하고 분별할 수 없는 존재가 분별과 많은 깨달음의 모든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원시 상태인 비존재는 적어도 유일하고 한결같은 실체인데 진짜 우주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거부할까요? 그러면 특정 불교 학파의 공은 진정한 고행적 해결책이 될 것이며, 진아는 자아처럼 허구적 현상 의식이 만든 단지 관념의 형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우리가 말에 현혹됨을 봅니다. 마치 언어적 구별이 궁극적 진실을 완전하게 표현하고, 그러한 편협한 구별의 관점에서 우리의 초자연적 체험을 묘사하는 것처럼 언어적 구별에 의지하며, 우리의 제한된 정신의 신랄한 반대에 속습니다. 비존재는 말일 뿐입니다. 그것이 나타내는 사실을 조사해 볼 때, 완전한 비존재는 존재의 무한한 진아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의 관념 형성과 별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가 이 우주에 있는 동안 알거나 상상한 가장 순수한 관념과 실제 존재에 대한 가장 추상적이거나 미묘한 체험에서 나온 최후의 용어를 넘어서며,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절대적 개념을 벗어난 무언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그것을 넘어설 무에 대한 허구를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특정 철학에서 말하는 공을 면밀히 검토할 때, 우리는 정신이 유한한 구성만을 이해하며, 전체 또는 애매한 무한함은 정신이 인식하지 못하기에 없는 것과 같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유일한 진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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