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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의 초월적 본성: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말씀 3장 - 비드야사가르를 방문하다, 2부 중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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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는 1836년 벵골 시골의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라마크리슈나는 젊은 시절, 무엇보다도 신 의식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활발한 성지인 닥쉬시네스와르 칼리 사원의 사제장으로 있던 형에게 가서 함께 지냈습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라마크리슈나는 사원의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영적 수행을 계속하면서, 사원을 방문한 몇몇 뛰어난 수행자와 함께 공부했습니다.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아디 샹카라의 다스나미 승단에서 나가 승려인 토타푸리 마하라즈를 만나 신 의식이 완전히 깨어난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유명해짐에 따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닥쉬네스와르 사원의 스리 라마크리슈나를 방문했습니다.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신을 아는 궁극적 목표로 이끄는 모든 종교의 통합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많은 강연은 기록되었고, 나중에 수제자 중 한 명인 마헨드라나트 굽타가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5권으로 된 이 벵골어 고전은 영어로 『스리 라마크리슈나 복음서』로 번역됐습니다. 페이지마다 우화 속에 담긴 영적 지혜와 명쾌한 설명, 제자들과의 다정한 대화 등이 가득하며, 이제부터 3장 『비드야사가르를 방문하다』를 소개합니다.

이원적 세상과 브라만(궁극적 실재)의 초월적 본성 “스리 라마크리슈나께선 이제 브라만 지식을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브라만은 비디아(지식)과 이비디야(무지)를 초월한다. 그것은 이원성의 환상인 마야를 초월한다. 세상은 지식과 무지의 환상적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지식과 헌신, 그리고 「여자와 금」에 대한 애착,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을 포함한다. 그러나 브라만은 이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정의와 불의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인 지바에 적용된다. 그러나 브라만은 그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등불로 바가바타를 읽고, 다른 사람은 바로 그 빛으로 위조하기도 하나 등불은 영향받지 않는다. 태양은 그 빛을 악한 자뿐만 아니라 덕 있는 자도 비춘다. 그러면 고통, 죄, 불행을 어떻게 설명할지 물을 수 있다.

그 답은 이것들이 지바(개별 영혼)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브라만은 그것과 상관없다. 뱀에는 독이 있다. 하지만 뱀이 물면 다른 사람은 죽어도 뱀은 자기 독에 영향받지 않는다”

브라만(궁극적 실재)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브라만이 무엇인지 묘사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 즉 베다, 푸라나, 탄트라, 철학의 여섯 학파는 입으로 맛을 본 음식처럼 더럽혀졌다. 입으로 읽거나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더럽혀지지 않은 것은 단 하나로, 바로 브라만이다. 아무도 브라만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

스승: 한 남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교사에게 보내 브라만의 지식을 배우도록 했다. 몇 년 후 그들은 교사의 집에서 돌아와 아버지 앞에 절을 했다. 그는 브라만에 대한 그들 지식의 깊이를 재기 위해 먼저 맏아들에게 질문했다. 「얘야, 너는 모든 경전을 공부했다. 이제 브라만의 본성이 무엇인지 말해 보거라」 아들은 베다의 여러 구절을 암송하면서 브라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떤 말도 없었다. 그 후에 작은아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아들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뻐하며 그에게 말했다. 「아들아, 너는 브라만을 조금 이해했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단다」”

개미와 설탕 언덕의 비유 “사람들은 종종 브라만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여긴다. 한번은 개미가 설탕 언덕에 갔다. 한 알로 배를 채웠다. 다른 알을 입에 물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개미는 가는 길에 생각했다. 「다음에는 언덕 전체를 집으로 가져갈 거야」 그것이 피상적인 두뇌의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브라만이 사람의 말과 생각을 초월함을 모른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브라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수카데바(리쉬)와 현자는 큰 개미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많아야 설탕을 여덟 알에서 열 알만 옮길 수 있었다! 베다와 푸라나에서 말한 바가 무엇인지 아는가? 한 남자가 바다를 보았고,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고 하자. 「음, 바다는 어떤 곳인가요?」 첫 남자는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말한다. 「멋진 광경이오! 파도와 소리가 정말 엄청났소!」

경전에 나오는 브라만에 대한 설명도 이와 같다. 베다는 브라만이 지복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치다난다(진리 의식 지복)이다. 수카(리쉬)와 다른 현자는 이 브라만 바다의 해안에 서서 물을 보고 만졌다. 한 사상학파에 따르면 그들은 결코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다. 바다에 뛰어든 자는 세상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소금인형의 우화 “삼매에서 브라만에 대한 지식을 얻고 브라만을 깨닫는다. 그런 상태에선 논리가 완전히 멈추고 사람은 침묵하게 된다. 그는 브라만의 본성을 묘사할 힘이 없다. 한 번은 소금인형이 바다의 깊이를 재러 갔다. 남에게 물이 얼마나 깊은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자마자 녹았기 때문에 바다를 잴 수 없었다. 이제 누가 바다의 깊이를 알리려고 거기 있는가?

신도: 어떤 사람이 삼매에서 브라만 지식을 얻었다고 가정하면, 그가 더는 말을 하지 않는가요?

스승: 산카라차리아(아바이타 학파에서 수도원장)는 남을 가르치기 위해 「지식의 자아」를 유지했다. 브라만을 본 후에 사람은 침묵하게 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 동안 그것에 대해 추론한다. 난로 위의 냄비에 비건 버터를 가열하는데, 그 안에 물이 남았다면 지글지글 소리가 난다. 하지만 물이 없어지면 녹은 비건 버터에선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 비건 버터에 익히지 않는 반죽을 넣으면 다시 지글지글 소리가 난다. 하지만 빵이 익으면 모든 소리가 멈춘다.

이처럼 삼매에 든 사람은 남을 가르치기 위해 상대적인 의식의 세계로 내려와 신에 대해 말한다. 꽃 위에 앉아 있지 않은 벌은 윙윙거린다. 벌이 꿀을 마시기 시작하면 조용해진다. 하지만 때때로 꿀에 취하면 다시 윙윙거린다. 빈 물 주전자를 물에 담그면 꾸르륵 소리가 나지만 가득 차면 조용해진다. 그러나 그 물을 다른 주전자에 부으면 다시 소리를 들을 것이다」”

고대 인도의 리쉬 “옛날 리쉬들은 브라만의 지식을 얻었다. 세속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이것을 얻을 수 없다. 리쉬들은 정말 애썼다! 그들은 이른 아침에 은거지를 떠나 온종일 홀로 브라만에 대해 명상하며 보냈다. 밤에 그들은 은거지로 돌아와 약간의 과일이나 뿌리를 먹곤 했다. 그들은 시각, 청각, 촉각의 대상과 다른 세속적인 것들을 마음에서 멀리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내면 의식으로 브라만을 깨달았다.

그러나 칼리 유가(암흑시대)에는 인간은 살기 위해 완전히 음식에 의존하기에 자신이 육신이란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이런 마음 상태에서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온갖 세속적 일을 할 때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세속적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나」란 인식을 버릴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나는 신의 종이다. 나는 신의 헌신자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헌신의 길을 따라가도 신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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